종려주일 설교 3편

종려주일 설교 3

1. 우리의 질병을 책임지신 예수(534-6)

2 너희를 위하여 몸을 나누고 피를 붓는 것이라(2214-20) -6

3. 종려주일과 호산나(99-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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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질병을 책임지신 예수(534-6)

성경본문: 이사야 53:4~6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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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여러분, 요즘 정말 힘드시죠?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이며 이어서 큰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힘이 들 때 사람들이 먼저 생각하는 것은 치트키입니다. 치트키라는 말은 속임수라는 뜻으로 원래 게임에서 나온 용어인데 요즘에는 지름길이라는 의미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치트키는 게임 같은데서만 사용하고 신앙 생활하는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장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이 문제는 왜 왔으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번에 우리교회에 방문한 시청 직원이 목사님 이 코로나 언제 끝나요?물어서 목사도 모른다고 했더니 빨리 끝나도록 기도 좀 많이 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이분이 천국 문에 가까지 와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공무원이 목사가 기도하는 것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분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고 또한 감사한 것은 이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근본적인 답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성경에서 답을 찾고 성경적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1. 질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COVID-19”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치사율 때문입니다.

현재 세계적 치사율이 5.32%이지만 이 사태가 끝난 후에는 치사율이 좀 더 올라갈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COVID-19”라는 질병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죽음은 왜 왔을까요?

또 이 죽음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하나님이 처음에 아담을 만드실 때는 죽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완벽하게 만드신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고 죽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아담이 먹은 문제는 그 열매에 무슨 독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만일 독이 문제라면 아담 혼자 죽으면 끝이 나겠죠.

아담의 진짜 문제는 그가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선택한 죄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바로 아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지금 사람들의 문제는 “COVID-19”가 아니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는 이유는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만 두려워할 뿐 하나님을 떠난 죄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질병이나 사고로 죽습니다.

흔히 자연사라고 하는 노화도 사실은 질병입니다.

또 자살도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그런데 이런 육신적, 정신적 질병이 오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떠났기에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식물로 말하자면 뿌리를 잘라 버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사는 방법은 하나님께 다시 붙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무에 접붙이는 방법을 아시나요?

예를 들어 귤나무를 번식하려면 탱자 씨를 심고 적당히 자랐을 때 그 위에 귤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됩니다.

그런데 만일 귤나무 가지를 여러 개 잘라 와서 접붙이고 남은 것을 그대로 두면 말라 죽어버립니다.

나무 가지가 말라 죽는 원인은 뿌리를 떠났기 때문이듯이 사람이 죽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죽는 존재가 된 인간이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각종 질병에 걸립니다.

인류는 그 동안 의술의 발달로 많은 질병을 극복해 왔지만 새로운 질병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바이러스도 계속 변종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병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근본 질병을 대신 책임지고 감당할 해결자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 해결자는 누구일까요?

 

2. 질병의 해결자는 누구인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19’라고 부르는 이 질병의 정식이름은 “COVID-19”입니다.

“COVID:”Chinese Originated Viral Infectious Disease“(중국에서 유래한 바이러스 감염병)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은 COrona VIrus Disease“의 약자입니다.

“COVID-19”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이것은 “Disease”(질병)입니다.

이 질병은 누가 해결할까요?

예수님보다 90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면서 그는 진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말합니다(53:4).

그런데 여기서 질고는 바로 질병(Disease)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질병(Disease)을 짊어지셨습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 이사야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질병에서) 나음을 입었다고 역시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메시아가 우리의 질병을 위해 채찍에 맞을 것이라고 한 이 예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이 채찍에 맞을 것이라고 누차 예고하셨습니다.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18: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그리고 복음서를 기록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예고하신대로 채찍에 맞으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7: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예수님을 처형하던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으로도 때리고 대나무와 손으로 머리도 때렸습니다.

(27: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15: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19: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오랜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질병에서 나음을 얻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러면 메시아는 왜 이렇게 온 몸에 채찍에 맞고 또 머리도 맞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을까요?

이사야는 그가 그렇게 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질병,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대신 맞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같이 하나님을 버리고 죽는 길로 꾸역꾸역 떠났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모두의 죄를 한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는 것이 이사야의 설명입니다(53:6).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사형수가 된 것입니다.

 

사형수를 죽일 때 교수, 참수, 독살 혹은 총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의 죄가 매우 악하면 사람들은 그를 더 고통스럽고 더 잔인하게 죽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능지처참이라는 것이 있었고 로마인들은 크리스천들을 맹수에게 잡아먹히게 하거나 불로 태워 죽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죽이는 방법은 바로 십자가형입니다.

사형수를 못 박아 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하루 혹은 이틀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갑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는 것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잔인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채찍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2004년에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를 보면서 저는 채찍질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 채찍질당한 모습의 사진 몇 장을 구해왔는데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렇게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채찍질을 당하셔야 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질병,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을 다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채찍에 맞으셨기에 이제 우리의 질병, 우리의 죄악을 해결 받을 수 있고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끔찍하게 고난당하셨음을 기억하는 주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질병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3. 질병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사람들이 질병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죽기 때문입니다.

병에 걸려 고생을 좀 해도 죽지 않는다면 이렇게 벌벌 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무서워하는 질병은 죽음의 과정일 뿐 죽음의 진짜 원인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질병을 통해서 죽는 것이지 질병 때문에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질병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에 죽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아가 오면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35:5-6).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오신 후에 지상에 맹인이 사라지거나 못 듣고 못 걷는 사람이 다 치료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그 메시아임을 증명하시려고 여러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지만 모든 환자를 다 고쳐주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진짜 문제는 못 보고, 못 듣고, 못 걷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사야의 예언이나 예수님의 사역을 볼 때에 예수님은 몇몇 사람의 병이나, 몇몇 종류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근본적인 고질병을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오기 전에는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었나요?

언젠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물러갈 텐데 그때는 세상에 문제가 없을까요?

결국 인류의 문제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같은 질병이나 각종 장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진짜 문제는 죄입니다.

죄가 진짜 인류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죄란 무슨 나쁜 짓이나 못된 행위가 아닙니다.

죄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죽는 존재, 그런 상태가 바로 죄인(罪人)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각종 질병으로 죽어갑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온갖 행위들을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쁜 행동이 죄라는 것은 알지만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은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죄 문제를 대신 책임지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허물, 악함을 다 책임지시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진심으로 고백하며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근본 질병인 죄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즈음에 여러분의 궁금증은 이것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 받으면 “COVID-19”나 각종 질병은 어떻게 되나요?

대답해 드릴게요.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와 질병을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죄와 질병과 죽음과 눈물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궁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질병을 치료해 주지 않나요?

COVID-19”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까?

대답해 드릴게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어떤 병은 치료해 주십니다.

또 어떤 병은 고쳐주지 않고 그 병으로 죽어 천국에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질병을 치료해주시는 것보다 질병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고 지옥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마치는 말

얼마전에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던 의사 한 분이 사망했습니다.

이 분은 다른 사람을 살리다가 자신이 죽었습니다.

지난 27일에는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최초로 알린 의사 리원량이 중국 공산당에 압력을 받았지만 환자를 치료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리원량이 죽었을 때 전 중국이 애도했습니다. 저도 슬퍼했습니다.

이 의사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다가 죽었지만 COVID-19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다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질병을 감당하시려고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 죄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 죄와 질병의 문제를 맡기시면 됩니다.

그러면 죄와 질병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생복락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이러스와 질병도 물리쳐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 여러분은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고 치트키를 찾지 마시고 기본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조용히 나가 여러분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539,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찬송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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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 몸을 나누고 피를 붓는 것이라(2214-20)

성경본문: 누가복음 22:14-20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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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한 주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할 당시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棕櫚-, palm tree)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구원하소서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부활절 전 주일을 종려주일(Palm Sunday), 혹은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릅니다.

서로마 교회에서는 종려주일에 그리스도의 수난사(受難史)를 낭독했기 때문에 '고난의 주일' (Dominica Passionis)이라고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보내신 마지막 일주일 사역 중에서, 목요일에 있었던 이른바 마지막 ()만찬장면입니다.

‘“만찬”(晩餐) 이라고 하면 어감상 언뜻 풍성한 식사를 연상할 수 있지만, 한자의 의미는 해질 무렵 저녁식사로,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는 저녁 식사를 의미합니다.

14절에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 호라)”는 단순하게 하루의 해가 저물고, 저녁을 먹어야 하는 특정한 식사 시간의 때를 말 할 수 있겠으나, 예수님은 15절에서 이 때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강조하여 말씀하심으로, 지금의 때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원하고 원하였다는 오랫동안 갈망(desire)하여 왔다는 것을 극대화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헬라어(에피뒤미아 에페뒤메사) 원어상의 의미는, 시간적으로, 장소적으로, 상징적으로, 여러 가지 조건에 완벽하게 맞는 그러한 식사 자리였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의중을 유추해 본다면, 나는 오직 이날, 이때만을 위하여 여기까지 왔노라. 이날과 이때는 내가 반드시 왔어야 하는 때이다뭐 이런 의미일 것 같습니다.

원하고 원하였다는 말씀 안에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심을 앞둔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초와 고뇌를 엿 볼 수 있고, 그와는 반대로 죽음을 초월하는 신적인 계획을 예비해 두셨다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그 때가, 그 날이 드디어 오고야 만 것입니다.

함께 식사하는 제자들을 제자라고 하지 않고 사도라고 호칭 한 것도 특별해 보입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사도라고 말한 것은 총 11번인데, 마태복음 1, 마가복음 1, 누가복음 9번이고,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유독 누가가 이렇게 사도라는 말을 많이 쓴 것은 아마도 누가가 사도행전도 함께 쓴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아포스톨로스)라는 말 자체가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누가의 입장에서는 제자들을 항상 보냄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자들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사도로 완벽하게 준비되는 마지막 절차가 바로 성만찬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기에, 종려주일과 고난 주간을 준비하면서, 우리 모두가 만찬의 자리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첫 번 째 하신 말씀은 15, 16절입니다.

읽어 드립니다.

15.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아멘.

15절에 원하고 원하였다라는 말은 열망하다라는 말의 반복으로 대단한 열망이 낳은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열망인가요?

고난이 있음에도 내가 해야 될 일을 멈추지 않는, 죽음을 각오한 열망입니다.

고난을 뜻하는 ‘passion’이라는 영어 단어가, 시간이 흐르면서 열정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고통, 죽음까지도 각오할 정도로 강한 집념과 정열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장먼저 주님을 향한 우리의 ‘passion’(열정), 곧 신앙의 열심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16절 말미에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확신에 찬 굳은 결심을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대한 결심입니까?

내가 살아가는 삶의 습관을 정리하고 바로잡는 결심입니다.

우리가 실천적으로 할 수 있는 결심은 이런 것들입니다.

나쁘고 거친 말 하지 않겠다는 결심, 거짓말 하지 않겠다는 결심, 응답 될 때까지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결심, 예배의 자리는 무조건 지킨다는 결심, 가족구원을 위한 전도는 죽을 때 까지 하겠다는 결심, 복음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도 기꺼이 지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결심을 가지고 끝까지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합당한 사람입니다.

이번 종려주일은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열정과, 나의 삶의 습관들에 대한 새로운 변화의 결심이 새롭게 세워지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두 번 째 하신 말씀은 17, 18절입니다.

읽어 드립니다. “17.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아멘.

그토록 만찬의 자리를 원하시고 원하셨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단호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삶의 초점은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이 아닌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지 라는 시한을 정하시고, 일절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 하신 것은, 지금 당장의 음료와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영생을 누리는 천국 만찬을 소망하신다는 미래지향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사도들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6:31,32) 말씀 하셨지만, 우리는 매일 같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아웅다웅 하며 살아갑니다.

염려하고 근심하고 심지어 폭력을 휘두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기는커녕, 하루 한 날도 아니고, 단 몇 분 몇 초도 참아내지 못하고 분을 내고 성을 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다 땅에 있는 것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에 우리는 마음속의 미련, 욕심,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을 과감하게 버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까지 하늘나라 만찬만을 소망하는 굳센 믿음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3.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세 번 째, 네 번 째 하신 말씀은 19, 20절입니다.

읽어 드립니다. “19.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아멘.

이 말씀은 성만찬 예식을 할 때 제정의 말씀으로 봉독되는 구절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도 너희를 위하여 몸을 나누고, 피를 붓는 것이라”, 바로 여기 구절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은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하나도 없겠지만, 이 말씀이야말로 부름 받은 제자(사도)라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나라의 예비 된 거룩한 성도라면, 죽기까지 단 1초도 잊어서는 안 될 말씀 중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 중에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 너희를 위하여 붓는 피라는 구절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설교 글을 쓰다가 이 부분을 다시 보면서 글쓰기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라는 말 대신에 제 이름을 넣어 10번 정도 읽어 보았습니다.

읽는 도중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찮은 저 같은 존재를 위하여 몸을 다 내 주시고, 모든 피를 쏟아 부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주룩 흘렀습니다.

그리고 제 입에서는,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 감사 합니다라는 말만 반복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을 내어 주셨다는 것이 진실로 깨달아지면, 감사하기에 앞서 너무나도 죄송하여서 얼굴조차 들지 못하고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의 최대 수혜자(受惠者, beneficiary)가 곧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고 고백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대충 대충, 적당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심의 화인 맞은 사람이 아니라면, 늘 감사하며,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엄청난 희생의 대가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지만 희생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보다, 세상의 향락과, 돈과, 내 욕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즐겨 합니다.

예수님을 선택하기보다, 예수님을 무시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열정은 점점 식어 가면서, 엉뚱하고 허황된 것에 대한 쓸데없는 열망(열심)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죄성은 끈질기고 집요하여 우리 생이 마감하는 그날까지,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달콤한 유혹으로 시험하며 넘어트리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에 속아 넘어갈 때 얼마나 우리 삶이 비참하게 되는 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이 당해 보셨죠.

그만큼 당해 보셨으면 치가 떨리도록 되를 미워해야 합니다.

죄 때문에 낭패와 실망을 맛보았으면, 더 큰 화가 미치기 전에 끊어내야 합니다.

반드시 죄와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기고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도록 강력한 무기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만찬의 제정입니다.

성만찬의 핵심은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을 기념하고, 새 언약 백성(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다는 진리-이신칭의) 이 되었다는 것을 깨우쳐 알게 하는 예식입니다.

우리는 24시간, 365, 내 일생의 전체가 성만찬의 시간이라고 못 박고, 그런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만찬 제정의 정신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항상 성만찬의 몸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먼저는, (몸과 살)을 나누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생명의 떡인 말씀이 항상 내 입술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고기반찬에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거하게 했어도, 말씀이 내게 있게 하지 아니하면, 나는 생명에 관해서는 쫄쫄 굶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해도,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기쁨과 평강과 소망을 가져다주지 아니하면, 나는 끝이 없는 광야 한 가운데 놓여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떡은 곧 말씀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님 이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단 1초도 떡이신 예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 바로 성만찬의 정신입니다.

또한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 피를 너희(나를)를 위해 부으셨다고 했으니, 피로 세움을 받은 언약백성다운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새 언약 백성다운 행동이요, 삶이겠습니까?

새 언약 백성은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음을 알고 늘 회개하며 살아갑니다.(9:22)

새 언약 백성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여 주시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힘쓰며 살아갑니다. (4:14-16)

새 언약 백성은 자신의 몸이 값 주고 산 것임을 귀하게 여기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갑니다. (고전 6:20)

새 언약 백성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신앙 태도를 버리고(3:15),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1초도 피로 세운 언약 백성임을 잊지 않도록 성령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만찬 제정의 정신입니다.

성만찬의 이 두 정신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5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보냄을 받은 자들인 사도들이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고, 그 정신을 성만찬에 담아 최후의 만찬에서 선포 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려주일, 고난주일, 부활주일 넘어 앞으로 남은 각자 인생의 모든 신앙생활의 시간 속에서, 생명과 진리의 말씀과 함께 하시면서 피로 세운 새 언약 백성다운 품위와 언행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너희를 위하여 몸을 나누고 피를 붓는 것이라

우리 주님의 마지막 남겨주신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일평생 단 한간도 놓치지 아니하고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구원의 길을 완주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최후의 만찬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그날까지 믿음의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능력과 지혜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죄를 사하시려 몸을 내 주시고, 피를 부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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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과 호산나(99-10)

성경본문: 스가랴9:9-10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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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새로운 시작의 달입니다.

경칩과 더불어 춘분이 들어있는 모든 만물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새학기를 맞아 학생들이 입학하고 진학하고, 새로운 친구 새로운 선생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종려주일고난주간이 들어 있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이 세상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에 나귀 타고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입성을 환호하면서 자기의 옷을 깔고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환영이 진정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을까요?

외형적으로는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환영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모두 나와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 당시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아관에 입각하여 로마의 압제 하에서 민족을 구원할 정치적인 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18:36"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신 대로 주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호산나가 무엇입니까?

호산나는 시118:25에 기원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외친 호산나 역시 잘못된 의도에서의 외침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지금 이 악한 육신의 현실에서 구원해 달라는 탄식이요, 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몰랐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그 큰 함성 호산나 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잘못 보았다.' '그는 우리를 압제에서 구원하러온 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우리들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정 알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종려주일을 지키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진정한 종려주일은 어떤 날일까요?

1. 왕이 오신 날입니다.

9: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여기 시온의 딸예루살렘의 딸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낱말입니다.

그리고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이 말씀은 자기 백성을 다스리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세계를 정치적으로 다스릴 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재림에 있을 일입니다.

바로 우리 각인을 다스리려고 오셨습니다. 이것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오해는 계속 되었습니다.

21:10-11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소동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때문에 우리 권세가 끝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 오해는 로마에서도 계속하여 이어졌습니다.

황제가 다스리던 로마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라고 대놓고는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랬다가는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 해서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는 등 온갖 박해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지상의 왕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의미요,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 얻었습니까?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권세 아래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그의 말씀 앞에 꼼짝할 수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복해야 할 나의 왕이 오셨습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삼고 진실로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2. 겸손하신 왕이 오신 날입니다.

9:9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했습니다.

당시의 개선하는 왕의 모습은 군마를 탄 찬란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버킹검 같은 영국의 궁전에서는 그런 의전 행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도 어린 나귀였습니다.

양탄자 대신에 나뭇가지요, 땀내나는 백성들의 겉옷이었습니다.

요즘 같다면 고무신 신고 자전거 타고 오신 것입니다.

자존심 강한 사람들은 아무리 주님이시라도 봐드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위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를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왕으로 모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거지로 찾아오시고 환자로 찾아오시고 노숙자로 찾아오신다면 기쁨으로 맞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혹시 예수님이 변장하고 오시지 않았을까 하고 몇 번은 잘할 수 있어도 펑하고 사라지지 않으신다면 끝까지 달갑게 모실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3. 평화의 왕이 오신 날입니다.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여기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남쪽 유다입니다.

분단 된 두 나라는 계속하여 전쟁했습니다.

문자대로라면 전쟁이 없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을 예수로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스가랴가 예언한 평화는 바로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평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도 두 마음이 싸웁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입니다.

성령의 생각과 사탄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 아래 있을 때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7:18-19) 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려주일의 시작은 남북한의 평화도 아니요, 세계의 평화도 아닙니다.

먼저는 곧 내 마음의 평화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를 왕으로 모셔서 누리는 승리의 평화여야 합니다.

몸이 아프면 다스릴 약이 있고, 악이 성하면 다스릴 공권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죄는 어떻게 다스립니까?

예수님이 다스려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려주일은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변화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요, 우리의 영원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변화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큰 기쁨과 즐거움과 겸손함으로 우리의 왕 예수님을 받아들여 아버지와 성령 안에서 진정한 평화와 변화를 경험하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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