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예수 믿는 신자임이 정말 확실한가?(창3장7)

당신은 예수 믿는 신자임이 정말 확실한가?(37)

성경본문: 창세기3:7

78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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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의 자녀인 불신자

불신자들이 들으면 크게 반발하겠지만 성경은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선언한다. 바울 사도는 그들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영을 따르는 불순종의 아들이라고 했다.(2:2) 또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그들 심령에 비취는 것을 막고 있다고도 했다.(고후4:4) 예수님은 아예 대놓고 너희는 아비 마귀에서 났다고 꾸짖었다.(8:44) 그것도 당시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하게 알고 열심히 따르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엄청난 사건이자 너무나도 큰 은혜다.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과 소속이 완전히 바뀐 것이지 않는가? 과연 신자들이 이런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믿게 된 의미를 간증해보라고 하면 주로 어려운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해결되어서 감사하게 되었고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자기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설명은 거의 듣지 못한다.

 

물론 성경도 예수님이 표적을 베푸신 이유를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 첫째 목적이라고 밝혔다. 하나님도 특별히 머리가 다 굳어진 어른을 복음으로 인도하려고 고난에서 탈출 시키는 방안을 자주 쓰긴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탄도 질병과 환난을 해결해 준다. 고난에서 구출이 복음으로 이끄는 과정이긴 해도 복음 자체는 아니다. 현실적 은혜가 기독교에 가장 많이 나타나긴 해도 그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기독교답게 만드는 첫째가는 중요한 특성은 아니다.

 

사탄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귀신이 들려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 신기가 내려 점을 치는 무당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단순히 살아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끝까지 완악하게 외면하여 그 반대편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본문이 바로 그런 불신자의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지금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거역한 직후에 생긴 변화를 말하고 있다. 아직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서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입히기 전이다. 다시 구원 받아 그 관계가 회복되기 전인 타락한 상태다. 아담과 이브는 지금의 불신자와 동일한 상황에 일시적으로 처한 것이다. 바로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자녀 된 모습이다.

 

사탄은 인간을 죄에 빠트린 다음에 그 죄로 인해 변화되어서 생긴 부작용과 폐해들 몽땅 인간이 감당하도록 한 후에 완전히 뒷전으로 빠져 버렸다. 죄의 기원에 대한 책임은 사탄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이 얼마든지 사탄의 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사탄은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겠니?”라고 아주 단순하게 부추겼을 뿐인데도 말이다. 반면에 그 부추김에 넘어가 죄를 지은 결과는 너무 심각했고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족쇄가 되었다. 크게 보아 두 가지인데 오늘은 첫째 결과만 살펴보기로 하자.

 

눈이 밝아진 결과

 

눈이 밝아 자기들이 벗은 줄 알게 되었다. 일부 이단종파에서 주장하듯이 성()에 눈이 떤 것이 아니다. 부부간의 성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다. 또 타락 전에도 벌거벗었다는 표현이 나오고(2:25) 남자가 여자를 떠나 이미 한 몸이 되었다. 나아가 아직 두 사람 뿐으로 성으로 인해 구태여 몸을 가릴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지혜가 늘어나 기후가 추워질 것에 대비해 옷을 지어 입은 것도 아니다.

 

무화과 나뭇잎 치마의 용도가 벗은 것을 가리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명시해놓았다. 가린다는 것은 보여주기 싫다, 감추고 싶다, 뭔가 부끄러운 것이 생겼다는 뜻이다. 자신이 오염되어서 이전과 비교해 더럽고 추해졌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성경은 원래 장절의 구분이 없다. 한 명의 저자가 이야기를 죽 이어나간다. 핵심주제가 분명히 있고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흐트러지지 않게 내용을 전개한다. 따라서 성경은 반드시 본문과 앞뒤 문맥에서 그 해석의 열쇠를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본문은 앞의 225절과 대칭되는 구절이다. 그 때는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 죄로 타락하기 전이었다. 나뭇잎으로 감출 뭔가가 없었다. 부끄러울 것 없이 서로가 정말로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했다. 말 그대로 일심동체(一心同體)였다. 요즘으로 치면 스마트폰을 비밀번호로 잠그지 않았고 배우자 몰래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았다.

 

몇 번 강조한 대로 당시는 두 사람뿐이므로 창세기 1-3장의 기사는 부부관계를 떠나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해서 살펴야 한다. 인간 사회에 아직은 사기, 거짓, 부정, 음모로 상대를 조종 농간하려는 의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인간 특별히 부부 두 사람 사이에 균열과 왜곡과 분리가 발생할 수가 없었다.

 

이 인류 최초로 지은 죄는 인간끼리 도적, 폭행, 간음 등을 행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은 짝꿍이 맞아 사이가 아주 좋았다. 단지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뜻을 맞추었을 뿐이다. 원죄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너무 난해하게 여기고 어렵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간단하다. 지금도 인간끼리 서로 잘해보자고 짝꿍이 잘 맞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외면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 또 그런데서 현재 인류의 모든 문제가 발생했지 않는가? 인류 최초로 지은 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끼리 뜻을 합쳐 하나님을 거역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자신의 벌거벗었음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무가치함, 무력함, 불완전함을 절감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는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밖에 몰랐다. 두 사람 사이에 순전한 사랑으로만 충만했다. 그런데 자기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지우자마자 그 좋았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다 빠져나갔다. 자동적으로 순간적으로 완전히 정반대의 상태로 변했다.

 

무슨 뜻인가?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타락 전에는 자기 속에서 선이 나오고 자기는 선한 줄로만 알았다. 인간은 기껏해야 하나님이 다 조성 공급하시는 자기 안과 밖의 선을 활용 적용할 수 있을 뿐임을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만 빼고는 다른 것 다 먹어도 된다고 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먹어 배가 터져도 죄악은 아니다. 반면에 선악과는 단 하나만 먹어도 배가 터져 죽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순간 선이 악으로 변모되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곧바로 사탄의 소속으로 바뀌었다.

 

악의 화신인 사탄은 범사에 악밖에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께 속했을 때는 자기 속에 선으로 가득 찼었다. 사탄에게 속함으로써 인간의 속에는 이젠 악 밖에 생기지 않는다. 속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추하고 더러운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당신의 반대편 즉, 사탄으로 향하는 순간 정녕 죽음을 맞는다고 한 것이다.

 

상대에게 들키기 싫다.

 

지금 아담과 이브는 서로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순간 둘 다 동시에 순간적으로 자신이 추해졌음을 스스로 감지했다. 혹시나 그 추함을 상대가 눈치 채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거기다 사탄의 꾐에 넘어가긴 했지만 둘이 작당해서 하나님을 거역한 공범임을 서로 부인할 수 없었다. 더더욱 상대를 쳐다보기 민망해졌다. 똑 바로 쳐다볼 수 없이 안쓰러워졌다. 둘 사이에 투명성 순전성이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자기들이 지금 영적으로 어떤 상황에 빠졌는지 정확히 인식은 못했어도 이전과 다른 부조화와 부족한 상태에선 벗어나고 싶어졌다. 선하지 않는 상태임은 확실히 알았다. 역설적 비유로 몸에 옷을 걸치지 않고 자신의 실체가 완전히 발가벗겨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일단 서로 쳐다보지 못하는 요즘 말로 오글거림은 막아야 했다.

 

우선 무화과 나뭇잎 치마로 가렸다. 그래서 그 현상이 제거되었는가? 결코 아니다. 임시처방도 되지 않았다. 만약 부끄럼이 없어졌다면 하나님이 다시 가죽옷을 지어 입힐 리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본문과 앞의 2:25는 다시 정확히 이렇게 읽어야 한다.

 

먼저 2:25는 아무 것도 가리지 않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는 부부가 각자 하나님과 순전하게 교제 동행했기에 가릴 필요도 이유도 없었으며 아예 수치심이라는 감정조차 알지 못했다. 본문 7절은 그러다 하나님을 거역하자마자 인간이 자기 스스로 수치를 가리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가려지지 않고 여전히 부끄럽더라는 뜻이다. 아무리 감춰도 감춰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불신자 시절의 마귀의 자식이었을 때의 첫 번째 상태가 바로 본문의 모습이다. 그저 자신을 감추기 바쁘다. 가장 사랑해야 하고 속임이 없어야 하는 아내 남편 사이도 그렇다. 도덕적인 죄를 지으면 모든 인간이 믿음이 있든 없던 부끄러워진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결과이며 죄가 갖는 추한 본질 때문이다. 불신자는 그런 부끄럼을 감추기에 급급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다. 신자는 인간이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알게 된 자다. 둘 사이에는 그 차이 뿐이다.

 

죄로 인한 수치감의 근본 원인

 

인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스스로 종교적 영적으로 명료하게 정리는 안 되어 있어도 까닭 모를 나약함, 불완전함, 부족함을 인지하게 마련이다. 염려와 초조는 삶의 불변하는 상수(常數)로 고정되어 있다. 갈급과 허망은 어떤 일을 해도 필연적 결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도덕적 죄를 짓기 이전부터, 아예 나면서부터 자기 잘못을 감추려 들게 되어 있다. 고상하고 경건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자기 실상이 그러지 못함을 본인은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해결책을 절대로 하나님 쪽에서 찾지 않는다. 겉으로 짓는 죄는 차라리 해결이 쉽고 빠르다. 재판 받아 감옥에서 형기를 살거나 손해배상을 하고나면 오히려 의인이 되고 떳떳해진다. 다시 그 문제로 골치 썩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을 모르면 선 자체가 실종된다.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 하나님과 사탄이 그러하듯이 선과 악 사이에 중립회색지대는 없다. 흔히 민족, 문화, 시대, 장소에 따라 상대적 선악이 있다고 주장한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사회의 표면적 결과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 진술일 뿐이다.

 

상대적 선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완전하거나 순전한 선이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또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감지하는 불완전함을 그렇게라도 감추려는 핑계요 헛된 노력일 뿐이다. 선은 오직 하나님께로 나오며 그분께 멀어지면 사탄에게 가까워지고 그럼 악이 나타나게 된다. 겉으로 추하고 더러운 행동이나 말로 나타나지 않아도 그렇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너무나 확실하다. 모든 인간은 자기 벗은 것을 부지불식간에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가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 가리는 모습은 요한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세 가지로 표출된다고 했다. 쉽게 말해 세상 사람은 재물과 권력과 명예로 자기 벗은 실체를 감춘다는 것이다. 나는 벗지 않았고 뛰어나며 선하고 의롭다고 자랑하려 든다. 그럼에도 아무리 가려도 부끄럽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무관한 불신자는 평생토록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다.

 

지금 성경은 그 모든 가림의 원인을 추한 행동이 아니라 벗은 몸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이 태생적 생래적으로 참 부모인 하나님을 모르고 고아처럼 이 땅에 버려졌다는 인식을 갖기에 자꾸 감추려 든다는 것이다. 결국 죄의 본질도 하나님과 분리된 실존론적 존재론적 상태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인간은 평생 동안 자기 실체를 감추려 드는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죄를 지은 결과만 감추려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에게 창세기 2:25의 상태는 불가능해진 것이다. 부부 사이에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자가 없어졌다. 인간 사회에서 100% 순전하고 완전한 사랑은 실종된 것이다.

 

진정한 믿음의 간증은?

 

그럼 예수를 믿은 후에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한 간증이 어떠해야만 하는가? 본문과 2:25간의 대비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알기 전에는 앞에서 든 예처럼 아내나 남편 몰래 비자금을 조성했고 스마트폰도 비밀번호로 막았다. 부부 사이에도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으나 전혀 죄로 여기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여겨졌고 내 부끄러운 벗은 몸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실은 내 벗은 몸을 보여주기 싫어서 감추려는 헛되고 헛된 노력이었다는 진솔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최근의 한국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편이 한 달에 천만 원만 벌어주면 바람을 피워도 용납하고 이혼하지 않겠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라고 한다. 순전한 사랑은 아예 없어졌다. 부부사이에도 이해타산만 남았다. 물론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 그것만 죽으라고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자기 인생의 행복과 의미와 보람을 책임지지 않음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돈이 주는 안락함과 편리함에만 다른 어떤 것보다 최우선 가치를 두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그것을 차지하겠다는 뜻이다. 그 외의 힘든 길은 너무 싫고 그것이 바로 인생의 실패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로는 형편이 어려워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지만 그 전에 그런 의견에 심정적으로 동의한 것조차 너무 부끄러워진 것이다. 바로 그런 모습이 내 추한 벗은 몸의 실체임을 절감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 달에 일억을 벌어주더라도 부부 사이와 각자에게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지 않으면 현실에서 아무리 형통해도 그만한 비참한 실패가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상태 그 자체다. 생래적으로 벗은 몸 즉,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감추고 싶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감추게 된다는 것이다.

 

윤리적 죄는 바로 그 죄의 본질에서 파생되는 모든 부작용이다. 요한이 말하는 세 가지 욕망이 저절로 생기게 되는데, 욕망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의 벗은 몸을 치장하여 감추려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모든 이들이 그런 사실과 원리를 전혀 모른 채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외면하는데 바로 그것이 마귀의 자녀가 된 상태다.

 

그럼 죄에서 구원 받으려면 가장 먼저 자신이 벗은 몸을 발견해야 한다. 또 그 벗은 상태를 자신의 어떤 노력과 수고로도 감출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치장 변장은커녕 성형을 해도 가려지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내 심령이 가난하고 갈급하고 허망함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만 채워지며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채워주셔야만 가능함을 체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비로소 하나님과 평생토록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표시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룩하고 의로워졌으며 이웃들에게 항상 선을 베푼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장에 부부 간에 부끄러움이 완전히 없어져 순전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여전히 죄를 범하고 악에 빠질 때가 있고 자기 자랑과 교만은 수그러들지 않을 수 있다.

 

단순히 스스로 잘나고 선해질 수 있다는 확신과 그에 바탕을 둔 실행이 사탄의 완전한 거짓에 속아 넘어간 결과임을 알게 된 것이다. 또 그런 확신이야말로 사탄의 자녀가 된 증거요 그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사망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 시절에 자기 치장하려고 죽기로 행한 헛된 노력을 중지했다는 것이다.

 

신자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아무리 추하고 더러워도 나갈 수 있다. 비록 나는 죄로 넘어지더라도 진정으로 겸손히 나아가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추가로 공급해주시는 선과 사랑에는 전혀 증감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 앞에서나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과 소속과 특권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광채를 자신의 삶과 인생을 통해 세상 앞에 비췰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오해는 말아야 한다. 신자 자신이 신령하고 고상하고 경건해진 것이 아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무능하다. 단순히 자신의 실체를 사람들 앞에서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불쌍한 존재이긴 마찬가지이니까 그렇다. 구태여 자신을 거짓으로 치장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헛되고 사실상 변장은 아예 불가능하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 없다. 신자는 매일 아침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벗은 자신을 발견하는 자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만 덧입길 소원한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선과 능력을 공급받고 그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스스로 자신을 치장해야만 하고 그래야 불안 초조가 없어진다니, 인간이 그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가? 그 자체가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또 그런 진리를 전혀 몰랐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바로 그것이 사탄에게 속아서 그의 자녀가 된 여실한 증거이지 않는가?

 

이제 예수 믿은 후의 간증은 달라져야 한다. 기도 응답 받아 불치병이 나았고 사업이 흥했다는 식은 그만 두어야 한다. 사회, 직장, 가정, 교회에서 다른 사람 앞에 정말로 순수하고 투명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이라는 체험적 고백이 나와야 한다. 내게 유익해지려고 다른 이에게 거짓, 위장, 사기, 모략으로 절대 조종 농간하지 않아야 한다. 남에게 보여지는 내가 바로 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내 속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거짓을 행하지 않기에 남이 나에게 거짓과 부정을 강요해도 당당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잘 알기에 나에게 손해가 막심할지라도 나를 감추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누구에게나 내가 순수하고 투명하기에 떳떳하고 당당해지는 것이다. 나아가 그럼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은 반드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공급해주시는데 그것이 훨씬 더 큰 기쁨이요 행복임을 절감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벗은 몸으로 태어난다. 태생적으로 부족하고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다. 아담이 타락한 필연적 결과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예외가 아니다. 대신에 내 스스로는 절대로 완전한 선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기에 오직 하나님 주시는 선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다. 그래서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영을 따라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변장무도회장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 혼자서라도 민낯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가 신자다. 여러분은 과연 이런 참 믿음이 있는가? 정말로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는가?

 

9/13/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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