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자료 모음

 

4.19 혁명 자료 모음

차 례

  1. 혁명 배경, 과정, 결과

2. 4.19 혁명 의의와 원인

3. 4.19혁명

4. 4.19 혁명시

*************************************************************************************************************************************************

 

1. 4.19 혁명 배경, 과정, 결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하죠. 419일은 무슨 날일까요?

오늘은 419일 바로 4.19 혁명의 기념일입니다.

 

4월에는 여러가지 이슈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제1정당이 더불어 민주당으로 바뀌면서 여소야대의 정치판도라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고, 416일은 너무나 슬픈 날이었던 세월호 2주기였습니다.

벚꽃이 피고 모두가 즐거운 봄날에 있던 가슴 아픈 사연.그것이 알고 싶다와 그래도 많은 SNS채널을 통해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조금은 기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4194.19혁명을 기념하는 날이다.

사실 우리들은 필수로 국사를 배운 세대이기는 하나 많이 잊어버리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날에 있어서 그 내용을 조금이나마 나도 공부를 해서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해서 오늘의 포스팅을 간략하게 해보려 합니다.

하물며 연산군'내가 두려워 한 것은 오직 역사뿐이다.'라고 했겠는가.

기억할건 기억하자.

안되면 최소한 노력이라도..

 

박사 수준의 지식은 아니라도 오늘은 조금 4.19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겠씁니다..

우선 4.19 혁명은 왜 일어난 것일까?

바로 부정선거 때문입니다.

1960년에 치뤄진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계획으로 부정선거가 치뤄지자 이에 반발한 학생과 시민들이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부정선거에 반발하는 4.19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당은 10년정도 집권했던 정당인데, 쉽게 말해 이승만의 정권연장만을 위해 일한 정당입니다.

원래 이범석이라는 사람에게 주도권이 있었는데 이승만이범석이라는 사람을 거세할 계획을 세우고 그를 몰아내면서 더더욱 이상한 정당이 됩니다.

 

참으로 자유당은 어처구니가 없는 정당입니다. 대통령 3선 제한 철폐를 위해 개헌을 하려했고(아 물론 대통령이 잘하면 3선이든 4선이든 상관이 없겠으나. 그럴리가 있음?) 무소속의원들을 포섭해서 의원 정수의 3분의 2를 확보하고 나서 아주 그냥 지들 맘대로 하려고 '사사오입개헌'이라는 정치적 비리까지 저지르면서 이승만의 정권 연장을 위해서만 일하는 그런 정당이었습니디..

 

*여기서 사사오입개헌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이건 좀 숫자가 왔다갔다 하는 거지만 잘 보면 유딩산수이니 조금만 읽으시도록!

우선 자유당에서 권력 유지를 하려 한것이 베이스 상식으로 깔고 가고 권력유지를 위해 3선 금지조항폐지(대통령은 원래 2번까지만 할 수 있는건데 더 할 수 있게 하자고 하는게 그거임),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등을 포함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국회에서 이게 통과가 되어야겠지요

당시에 재적의원이 203, 참석의원이 202명이었습니다.

이 개헌안이 통과가 되려면 재적의원의 2/3가 찬성을 해야했습니다.

이걸 숫자로 보면 203*2/3 = 135.33333 이렇게 나옵미다.

그러니까 136명이 찬성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근데 이게 왠걸 찬성이 135표가 나왔습니다.

그때 자유당에서 0.33명은 존재할 수 없는 거라면서 135명만 되도 합당하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댑니다.

 

물론 당연히 인원이 안되었으니 당시 사회자는 부결을 선포한 후였습니다.

그리고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퇴장했는데 자유당 지들끼리만 남은 자리에서 날치기로 125명중에 123명이 찬성하고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게 말이됩니까? 당연 말이 안됩니다.. 논리도 웃기지만 이미 부결선포가 되었잖습니까?. 그거 엎은 것도 웃기고 야당이나 국회의장, 사회자의 의견을 무시한 것도 국회법위반이며 모두 위헌입니다.

 

4.19 혁명의 과정

자 이제 그럼 다시 4.19 혁명으로 리턴

315일 투표일 당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스타트!!

근데 경찰이 군종에 총을 쏘고 마구 잡이로 탄압하는 바람에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거기에 김주열 학생 사건이 일어나면서 시위는 더더욱 활화산 모드로!

 

* 김주열 학생 사건이란?

행방불명된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에 오른쪽 눈을 맞은 상태로 시신이 되어 바다에 떠올랐습니다.

이로 인해 혁명의 도화선이 제대로 지펴졌습니다.

근데 또 자유당이 또 웃기는 것은 마산에서 일어난 이 혁명을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했다며 수습하려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바보입니까?

진상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항의가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민주주의 혁명이 드디어 일어나게 된것입니다.

 

4.19 혁명의 결과

그리고 425.

각종 시국 선언문과 반대 시위로 인해 이승만이 결국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자유당 정권 붕괴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 역량을 드높이고 민주주의 발전의 새로운 기반을 가져온 혁명입니다.

자 이제 조금이나마 4.19혁명에 관해 좀 알게됩니다.

물론 나도 역사학자나 역사공부를 하는 학생이 아니라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만.

나 그냥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도 중요한 사건과 인물에 관해서는 다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자료를 좀 찾아보고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딱딱함을 탈피하고자 단어 선택이나 문맥의 흐름이 다소 매끄럽지 못한 것은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개인적인 성향으로 인해 글에 작성자의 개인 의견이 다소 묻어남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역사라는 것은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시각차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바랍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틀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면 수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암튼 오늘의 포스팅이 최소한 나의 이웃분들에게 만이라도 전달될 수 있었으면 함~~^^

아 그리고 혹시나 과제로 인해 이 포스팅을 찾아보시는 분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내일도 혁명적인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ㅎㅎ

옮겨 쓴 글

***********************************************************************************************************************************************************************

 

2. 4.19 혁명 의의와 원인

4.19 혁명 의의

19604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졌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사사오입 개헌과 같은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을 강행하였다.

그러다가 1960315일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자행되었는데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투표함 바꾸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의 부정선거(3.15 부정선거)로 선거 4대 원칙인 "보통선거, 평등선거, 직접선거, 비밀선거'" 원칙을 훼손하였다.

이에 같은 날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가 시민과 학생들 사이에서 들끓었다.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시민들을 강제진압에 나섰다.

그 같은 행위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의 공산당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핍박받았다.

이로써 이 4.19 혁명을 계기로 부정한 세력에게 뺏긴 진정한 민주주의를 챙 취하고 자하는 시민의식이 본격화되었으며,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4.19 혁명 원인

4.19 혁명은 이렇게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민주주의로 가는 길목에서의 굵은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생긴 이후 4111차 마산 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되었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제2차 시위를 선동하며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이어진 시위 행렬에 의해 학생들은 큰 부상을 입었고, 사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다음날인 419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시민들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고 탄압하였으며,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후에 시민들을 이러한 무력에도 굴하지 않고 완강하게 힘을 모아 투쟁하였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 직에서 하야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이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로지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민주주의 첫 승리의 축포 4.19 혁명!!

지금의 민주주의의 법통의 시발점을 알린 4.19 혁명의 그 위대하고 숭고한 정신은 헌법에 남아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1>

대한민국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2>

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4.19 혁명 결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첫 승리이자 국민의 손으로 직접 독재자를 몰아낸 민주주의 역사의 아주 중요한 기점인 날입니다.

4.19 혁명에 의해 가슴에 새겨진 민주주의 정신은 근현대사의 아주 중요한 기록이며 그 의미는 현대에까지 이어져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갔습니다.

현재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어 순국선열들의 혁명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중한 투표권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저들이 흘린 수많은 눈물과 피땀으로 이루어낸 성과!

 

그 의미를 되새기며 진정한 민주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권리를 꼭 주권자답게 실행해야겠지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이념은 세계에서도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국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시발점은 4.19 혁명!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뿐이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 4.19 선언문-

이들의 용기가 현재 우리나라 민주주의 꽃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옮겨 쓴 글

************************************************************************************************************************************************************************

3. 4.19혁명

본문내용

4.19혁명 원인과 이승만 대통령의 최후

일제 치하를 벗어나 해방이 되었지만 시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혼란의 와중에 1948년 남한 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된다.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되었고,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정부 수립후 채 2년이 되기 전에 전쟁이 발발해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많은 국민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국가를 제건해야 할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전쟁와중에 불법적인 개헌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 집권의 길을 열었으며,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지만 부통령에 민주당 장면이 당선되자. 이승만은 민심의 이탈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에서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였다. 조봉암19577월 결국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다.

장기 집권에 대한 음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관건을 총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한다.

자유당은 농번기라는 이유를 들어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15일에 실시하기로 한다. 그리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계획을 세운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정권 연장 야욕에 세상이 술렁였다.

첫 도화선은 228일 대구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였다. 정부 당국이 야당인 민주당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등교를 강요하자 학생들은 분노했고,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35일 서울 종로에서의 학생 시위, 38일 대전에서의 학생 시위, 310일 수원과 충주에서의 학생 시위, 이틀후 부산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오산, 포항, 원주, 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전개 되었다.

드디어 선거일(1960315), 사전투표(3인조 또는 9인조) 및 공개 투표에서 자유당은 완장 부대를 동원해 투표소 분위기를 자유당 분위기로 만들며 유권자들을 협박하고 야당 참관인을 투표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대리 투표 등 선거 부정이 자행되었다.

선거 결과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 이었다.

그러나 투표일 당일 국민의 기본권이 부정선거에 의해 찬탈되는 모습을 바라 본 시민들은 분개했다. 특히 마산 시민들은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다. 그 때 경찰들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시민 8명이 사망하고 수십여명이 부상 당했다. 이것이 바로 "3.15 마산 의거"였다.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는 316일 기자회견을 통해 3.15선거 무효 선언을 했다.

그 날 광주, 진주, 부산, 포항, 서울 등지에서도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발생했다.

그 결과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됐다.

46일 서울에서는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열기는 49일 부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4113.15마산 의거 시위 현장에서 사라졌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학생의 주검은 처참했다.

마산시민들은 한 고등학생을 죽이고 이것을 은폐하려고 했던 정권에 대해 분노하며 다시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제2의 마산 의거였다.

 

그러자 413이승만 대통령은 마산 사태등 일련의 정국에 대해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혼란을 만드는 자는 어디서든지 법대로 처리해서 시국을 정돈해야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강경 담화문이였다.

3.15선거 이후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학생들의 시위는 418일 서울, 부산, 충주에서 일어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될 기미를 보였다.

418일 서울에서는 고려대학교 학생 약 3천여명이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학생들의 행렬이 시내를 지날때 시민들은 열광적인 박수로 이 들을 지지했다. 드디어 국회의사당 앞까지 도착한 고려대 학생들은 결의문을 낭독했고, 이후 거리 행진을 시작한다. 종로를 지날쯤 갑작이 100여명의 괴한이 나타나 학생들을 마구 난타한다. 바로 정치 깡패를 동원한 것이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드디어 4193.15 .부통령 선거에 부정을 규탄하고 마산사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학생,시민 시위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발생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서울대, 동국대, 건국대, 중앙대, 연세대, 고려대 등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대광고, 동성고 등 고등학생까지 총 궐기했다.

수십만 시위 군중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지금의 청와대에 해당하는 경무대로 향했다.

그리고 120분 학생들은 바로 경무대가 눈 앞에 보이는 마지막 철조망 바리케이트 앞까지 다가갔다.

그 때 경무대 입구를 사수하던 경비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쓰러졌다. 이날 전국의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있었고 전국에서 벌어진 시위로 인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언론은 이날을 "피의 화요일" 이라고 명명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부통령인 이기붕을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민심은 이미 그를 떠나 있었다.

425일 오후,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있었고, 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오후3시 서울 동숭동에 있는 교수회관에 모인 258명의 대학교수들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쓰여진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했다.

교수들의 시위로 자극을 받은 시민들은 부정선거의 원흉을 잡아 내라고 소리를 높였다.

426일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부패한 절대 권력이 결국 국민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519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4 19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거행되었다.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공포하고 양원제를 채택하였으며, 헌법에서 기본권에 대한 제약한 조항을 철폐하였고 신문, 정당 등에 등록허가제도 없애고 국가보안법에서 언론 조항등을 삭제하는 등의 개혁을 했다.

대학교의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탄생하는 등 학원 민주화 운동도 전개되었다.

그 해 8윤보선 대통령장면 총리로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4 19혁명이후 사회 각개 각층의 민주화 요구는 들끓었다.

3 15부정선거 책임자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 교원노조 등 노동, 청년, 학생 운동에 활발한 전개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통일운동의 전개 등 우리 사회는 새로운 정의의 길을 제시해 나갔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국민의 열망을 개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결국 군인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바로 5 16 군부 쿠데타였다. 민주주의는 다시 긴 잠에 빠져들게 된다.

*이승만

본관은 전주, 호는 우남, 초명은 승룡이다. 1875326일 황해도 평산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내어나 3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위의 두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지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후 한문을 배우며 과거시험 준비를 하던 중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미국인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주고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우며 이듬해 졸업한다.

일본 칼잡이에 의해 민비 시해사건에 대한 복수사건으로 연루되어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후 개화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서재필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약한다.

1898년 반정부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투옥되어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고 복역 중 1904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만에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조선기독교청년협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17안창호와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 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한다.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 사회에서 그를 따르는 우남파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의 대립양상을 보이며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1943년 오스트라아 출신 프란체스카와 결혼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총재를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하고, 1946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한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되면서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창당 및 게엄령 선포등 반대파 국회의원을 탄압하면서 대통령에 재선된다.

19603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으로 당선되지만, 4.19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옮겨 쓴 글

************************************************************************************************************************************************************************

 

4. 4.19 혁명시

젊음의 피(정 성 수(丁成秀))

(평택중 3학년)

빠알간 피를 던져라

들끓는 경관들의 낯짝에다가 불붙는 피를 뿌려라

발길로 피를 차버려 산산조각으로 피의 안개를 세워라

그 속에 꿈을 꾸는 듯한 무지개를 태워라

최루탄을 도로집어 반대로 갈겨라

연기를 머금어라

연기를 뱉어라

피를 움켜잡으며 구호를 외쳐라

날뛰던 경관의 얼굴색이 변하게 몽둥이도 없이 총도 없이 최루탄도 없이 맨몸으로 몽둥이 삼아 총 삼아 최루탄 삼아 날아오는 것 받으며 끊임없이 달려라

분노 앞엔 모든 것이 굴복한다

얌전히 고개 숙여 항복하는 것들에게 소리 질러라

자유의 소리를 침을 던져라

쫓겨가는 독재자에게 먹구름이 일다

태양이 솟았다

드높은 하늘을 그대로 지녀라

피가 물든 넓은 태양 정열로 받아 가져라!

생각하라! -

-<SEE> 4월호(2015)

-시집 <개척자> (19611)​​​에서

 

 

 

 

 

 

 

 

 

 

댓글 작성은 로그인 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