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설교 4편
4.19 설교 4편
1. 4·19의 내용(암 5장24)
2. 공의의 분노(암5:14)
3.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시85편8 13 요20장19 21
4. 독재의 저항(왕하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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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19의 내용(암 5장24)
성경본문: 아모스5:24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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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독재정권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 이르러 그 부패가 극에 달해 온갖 부정적인 방법으로 정권유지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런 노골적인 불법 행위로 인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4·19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음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아울러 우리 성도들은 신앙적으로 4·19의거를 받아들여 우리 신앙의 유익한 도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볼 대 4·19는 어떤 내용을 지니는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I. 공의의 분노(암 5:24)
1. 공의로우신 하나님(시 89:14)
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즉 정의롭게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의와 공의가 주님의 보좌의 기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시 89:14). 때문에 우리성도들 역시 의를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무시하고 불의를 행한다면 반드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2. 공의를 행해야 함(암 5:24)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불법 속에 빠져 하나님의 공의를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값비싼 수입품인 상아 상에 누워 맛있는 것을 찾아 양의 새끼와 송아지 고기를 먹었습니다(암 6:4).
또 자기들의 사치한 생활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밟고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종교적인 절기들을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답시고 비파를 뜯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화목제나 비파소리대신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리라고 하셨습니다(암 5:24).
살기 위해서는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공의를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 율법을 배우면서도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베푸십니다.
4·19의 내용이 공의의 분노이듯이 우리는 선을 사랑하고 불의와 악을 미워해야 하겠습니다.
II. 개혁의 정신(사 1:21)
성경본문: 이사야1:21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1. 부패에 대한 개혁(사 1:21)
일제의 오랜 압제에서 벗어나 참다운 민주정치를 꿈꾸던 자들에게 4·19는 부패에 대한 개혁의 깃발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런 개혁 운동이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의 현대사는 더욱 암울했을지 모릅니다.
4·19는 이와 같이 부패한 정치에 대한 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도 부패했던 예루살렘을 정죄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신실하던 성읍이었는데 창기처럼 되었고, 공평과 의리의 도시가 살인자들로 가득 찬 도시로 되고 말았습니다(사 1:21).
방백들은 모두들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뇌물을 사랑하며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사 1:23).
이렇게 부패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패에 대해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신앙에 대한 개혁(스 10:1)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포로에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그 신앙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사는 등 그 신앙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 이스라는 신앙 개혁의 가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스라의 지도 아래 대대적인 회개 운동을 펼치여 하나님의 계명을 좇기로 하는 등 신앙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스 10:1).
우리는 4·19의거를 맞이하여 이런 신앙의 개혁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없는지, 개혁해야 할 요소는 없는지를 살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성도들은 우리 민족이 지은 여러가지 죄악들을 깊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로 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III. 독재에 저항(왕하 21:19)
1. 독재에의 저항(왕하 21:19)
성경본문: 영왕기하21:19
19 아몬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므술레멧이요 욧바 하루스의 딸이더라
4·19는 독재정치에 대항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그 후로도 독재정권은 유지되었지만 그런 정신이 살아 있기에 오늘날 정도의 민주정치라도 달성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의 왕들중에서는 히스기야나 요시야처럼 선한 왕도 있지만 므낫세나 아몬처럼 악한 왕도 있었습니다.
아몬 왕의 경우 아버지 므낫세 같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등 잘못된 정치를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신복들의 반란으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왕하 21:23).
왕위는 물리적인 힘에 의지한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살펴 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아갈 때 그 왕위도 영원하고 견고히 서는 것입니다(삼하 22:3).
2. 바른 정치를 요구함(왕상 12:4)
성경본문: 영왕기상12:4
4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솔로몬의 사후 북쪽 이스라엘 10부족의 대표들은 세겜에서 르호보암 왕에게 솔로몬 왕의 독재정치를 청산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왕상 12:4).
만약 이 때 르호보암이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바른 정치를 했더라면 이스라엘은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국토분단이라는 비극을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르호보암 왕은 올바르게 교도하는 노인들의 말을 어기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북쪽의 부족들은 다윗 왕가를 배반하고 여로보암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바른 정치 요구를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토대를 허무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4·19의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귀한 교훈들을 줍니다.
우리는 먼저 4·19역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된 것 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4·19 정신을 되살려 공의의 분노를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불의를 그냥 보고 참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 개혁의 정신을 가지고 잘못된 정치, 잘못된 신앙을 개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독재에 저항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올바른 정치를 요구하는 것은 백성들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4·19의 교훈들을 오늘에 되살려 보면서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정치적 감각을 가져야 하겠으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앙을 확립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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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의의 분노(암5:14)
성경본문: 아모스5:14
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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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를 잘 드러낸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선포를 사명으로 부여받아 먼저 이스라엘의 주변의 이방 나라들의 죄와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십니다.
공의의 분노는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자도 공의의 눈을 가져야 하며 공의의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본서에서 아모스를 통해서 주시는 공의의 분노를 함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I.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함(14절)
공의의 분노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 선을 사랑하십니다.
1. 악을 미워해야 함(롬 12:9)
성경본문: 로마서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진정한 공의는 죄 곧 악을 미워하는 데에서 옵니다.
원래 악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의와 선입니다.
악은 마귀가 인류를 범죄의 유혹으로 잉태한 것입니다(창 3:1).
또한 아담이 불순종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롬 5:12)시작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고(마 15:18) 욕심에서 나옵니다(약 1:14).
그러한 악을 철저히 미워하는 것이 공의의 분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죄를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아모스 선지자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방이들이 지은 죄를 심히 싫어하고 미워했으며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짓는 온갖 죄를 미워했으며 심판을 예고했습니다(암 5:16). 성경은 악의 모든 모양조차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살전 5:22).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악에 소속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악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악을 철저히 미워하고 추방해야 합니다.
2. 선을 사랑해야 함(잠 11:27)
성경본문: 잠언11:27
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선을 사랑하는 자가 공의의 분을 품을 수 있습니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 은총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선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나 1:7). 그선이 크신 분이며(시 31:19) 그 선을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 가운데 선을 베푸시는 분입니다(애 3:25).
하나님은 특히 자기 백성들이 선을 싫어하고 악을 행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습니다(호 8:3).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암 5:14)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시 23:6)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선한 마음과 선한 말, 그리고 선한 손과 선한 발, 또한 선한 눈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 할지라도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을 속하라'(롬 12:9)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살후 3:13) 선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그러한 자는 악에 대해 공의의 분노를 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얻습니다.
II. 공의를 무시할 때에 오는 결과(암 6:21-22)
성경본문: 아모스6:21-22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를 무시하게 될 때의 결과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에는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1. 절기와 성회와 모든 제사를 열납하지 아니함(암 5:21-22)
21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방인이든 자기 백성이든 죄를 짓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은총을 입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때때로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죄악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특히 아모스가 살던 시대의 죄악은 심각했습니다. 백성들의 사업이 번창하고 국토가 확장되며 나라가 번영하며 부귀를 누리자 이스라엘의 가진 자들이 자만하여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노예 매매를 하며 온갖 우상 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로아야 할 부유층 사람들이 구제하기보다 오히려 착취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암5:11).
온갖 사치와 방탕에 휘말렸습니다(암 2:6).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절기를 미워하고 멸시한다고 선포하셨으며 성회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암 5:21).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졌던 번제와 소제와 화목 제물조차도 받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공의의 분노를 발하신 것이며 공의의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오직 공법과 공의를 일으켜야 함(암 5:24)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공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예고 가운데서도 공의를 요구하십니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24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의 공의를 충만하게 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가난한 자의 착취를 금해야 하며 모든 우상 숭배를 금해야 하고 또한 모든 사치와 방탕을 금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즐겨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와이었던 사울은 왕의 자리에서 버림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음성 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삼성 15:23). 하나님은 제사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가자 기뻐하십니다(삼상 15:22).
III. 성도들도 주님처럼 공의의 분노를 발해야 함(막 11:15)
1. 주님의 의로우신 분노(막 11:15)
마가복음11:15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에 한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악 그 자체를 보실 때는 의로운 분을 품으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성전이 장사꾼들에 의해 놀림 당했을 때에 주님은 성전을 청결하게 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을 보고 새롭게 개혁하신 것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의 위선된 죄악을 보고 주님은 공의의 분을 발하시고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마 12:34).
2. 바울도 공의의 분노를 발함(행 17:16-18)
사도행전17:16-18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모든 죄악을 철저히 미워했습니다.
특히 우상을 싫어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에 온 성이 우상으로 가득한 사실을 보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주의 말씀 안에서 공의의 분을 느끼며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공의의 분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대로 알렸습니다.
참된 공의의 분노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할 때에 오는 그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큰 심판을 예고되었습니다. 모든 절기와 성회가 거절되었으며 모든 제사도 열납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인간의 욕심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보시고 의분을 품으셨습니다.
바울도 우상을 보았을 때에 의분을 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를 행하며 의로운 분을 품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개혁의 정신(막11:15-18)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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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바른 정신은 성경을 통해만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개혁해 온 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개혁된 개인이나 사회나 민족은 기쁨과 소망과 행복이 있습니다.
참된 개혁은 진리와 어긋나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개혁은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1517년경에 부패한 기독교를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믿음!"이라는 표어를 걸고 부패한 종교를 바로 잡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인류 역사는 개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경제가 부유해질 때마다 그 민족의 지도자와 백성들은 안일과 타락에 빠졌었습니다.
본문의 말씀도 상업이 번창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까지 물질주의가 흘러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개혁의 정신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I. 먼저 성전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개혁함(막 11:15-18)
성경본문:마가복음11:15-18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주님의 개혁 정신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을 가장 높이는 마음입니다.
1. 물질주의를 성전에서 몰아냄(15절)
주님은 하나님을 모셔야 할 성전을 지극히 사랑하는 정신에서 성전 청결의 개혁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장사꾼들은 부패한 대제사장의 허락으로 성전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대상으로 종교라는 미명 아래 순례자들을 착취하며 성전 안에까지 들어와 돈을 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부패한 탐욕의 무리들을 책망하시고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성전도 사모하게 되고 또한 그 성전을 사랑하는 자는 물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마 6:24).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친히 경계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눅 12:15)고 했습니다. 오늘날 황금 만능 주의가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질주의를 주의 말씀으로 물리치고 개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부패하면 모든 사회가 함께 부패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전을 가장 먼저 개혁하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 성전 자체도 정결케 함(16절)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와 돈 바꾸는 자를 다 내어 쫓으시고 성전 안에서 기구를 함부로 가지고 다니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만민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는 깨끗한 집으로 개혁하셨습니다. 주님은 성전 개혁을 통해서 성전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은 어릴 적부터 성전을 사랑하였습니다. 열두살 때에 부모와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아이 예수를 잃어버렸을 때에도 성전에서 다시 찾았습니다. 그때에 자기 부모에게 하신 말씀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대답하실 정도로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성전을 성결케 하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II. 범죄한 백성들을 복음으로 고치심(마 4:17)
성경본문: 마태복음4:17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초기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금식 기도하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아담의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부패해진 인간의 심령을 개혁하기 위한 것입니다.
1. 심령을 고치심
인간의 심령은 심히 부패해 있습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더러워진 심령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새롭게 개혁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이 있어서 어떠한 인간의 심령도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도 상한 심령입니다(시51:17).
아무리 더러운 심령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복음 앞에 회개하며 통회의 심령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는 자는 다 고침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부패한 심령을 지적하고 개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고침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천국 복음의 개혁운동으로 고침받은 심령은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2. 육신을 고치심(마 4:23-24)
성경본문: 마태복음4:23-24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주님은 범죄한 백성들의 육신까지 개혁하시는 분입니다.
육신의 개혁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목적 가운데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주님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셨습니다. 복음은 약한 백성들의 영과 육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천국 복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효력있는 개혁은 성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마 14:35). 중풍 병자들 고치신 일(막 2:11)과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신 일(마 12:22)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개혁하신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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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시85편8-13;요20장19- 21)
성경본문: 시편 85:8-13 요한복음 20:19-21
시편 85:8-13
8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11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2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3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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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9-21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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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시민저항전통의 뿌리가 된 4.19 민주혁명 47주년을 맞아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벌써 이 예배가 스물다섯 번째를 맞는 다고 하니 그동안 ‘4 .19 민주혁명 국가조찬기도회’를 주관해 오신 여러분의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 역시 당시 스무 살 청년이었고, 그 불우한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4.19세대임에도 그 역사의 교훈을 뒤 늦게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의 교훈은 당장 나타나는 열매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 뜻을 계승하고 가꾸면서 꽃을 피우는 씨앗이었다는 점에 말입니다. 그 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물과 피를 흘렸으며 희생되었습니까?
이제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더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은 후에 비로소 지난 20년 전부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단초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4.19 민주혁명은 완성된 혁명은 아니었으나 위대한 출발점이었고, 우리 사회의 오늘을 만들어낸 가장 건강한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날, 그 희생자들은 진정한 시대의 선각자요, 민족의 선구자였음을 믿습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사회는 평화로운 봄을 맞을 수 없었습니다. 1960년 4월과 1980년 5월 그리고 1950년 6월은 이 민족에게 커다란 상처로 각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늘 고난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부활의 시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 민족 전체가, 남과 북이 평화로이 하나 되고, 자유롭게 번영하는 그날일 것입니다. 당시 4월의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분단된 민족의 하나됨이요, 온전한 정의와 평화의 실현이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그러한 숭고한 정신을 기릴 뿐 만 아니라, 회복하고 계승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온 땅에 가득하고, 사람의 삶과 공동체의 평화로운 삶에 대한 약속입니다. 시편 85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이시리라.”(시 85:9)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소원과 의지를 드라마틱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시 85:10-13)
흥미로운 것은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사랑, 진실, 정의, 평화와 같은 매우 추상적인 낱말들을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남녀 간의 애정으로 의인화한 것처럼 보입니다. 눈이 맞은 젊은 남녀가 입을 맞추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사랑, 진실, 정의, 평화와 같은 특별한 낱말들은 사실 먼 이야기가 아닌 아주 가까운 일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는 표현처럼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헤아리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를 손꼽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정의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자는 이슬을 머금은 새 풀처럼 성장케 하시나, 사악한 자는 가시나무를 잡았다 금방 버리듯이 하나님이 버리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역사의 교훈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평화, 샬롬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샬롬은 단지 문제가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갈 때”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 직후,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이 있을찌어다”(요 20:19, 21, 26)라고 인사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고난과 아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셨는데 그것은 평화였습니다. 그 따듯한 주님의 문안에는 한 인간의 평안과, 우리 사회의 평강과, 온 세계의 평화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뜻을 온전히 실현해야 합니다.
그동안 이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는 ‘도피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도피함으로서 오는 평화입니다. 도피의 평화는 당연히 사물을 직시하고 현상을 돌파해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문제를 극복하는 평화였습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일도 우리들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입니다. 슬픔이나 고난, 위기나 박해도 그것을 그르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평화를 얻기 위해 오히려 권력자 앞으로, 십자가 위로 나서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요 14:31).
저는 우리보다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발걸음 속에서 47년 전 이 땅에서 살았던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연상하였습니다.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우리는 흔히 평화는 힘이 센 사람이나 배부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경험을 보면 강자가 저지른 전쟁이 그쳤다고 평화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는 모래 위에 세워진 집처럼 또 다른 힘이 나타날 경우에는 위태롭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평화는 힘에 의한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위세를 부리는 강자보다 고난을 겪는 약자들에 의해 평화가 모색됨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물질적 풍요만이 인간의 고통과 억압을 해소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면 범죄의 가능성이 있고, 가난은 반사회적이며 따라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빵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굶주리신 예수를 빵으로 유혹하고 굴복시키려 하였던 악마는 지금도 힘과 빵의 유혹으로 지금 우리의 평화를 흔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참 평화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평화를 얻기 위한 도상에 서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평화를 모색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불안을 극복하는 소극적인 데서, 궁극적 구원에 이르는 적극적인 데로 나서는 것임을 믿습니다.
4.19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앞장서시는 여러분은 참 평화이신 주님의 선물을 찾고, 또 소유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옛말에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가꾸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이 참된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정의를 바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정의를 통한 평화를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분단 시대는 우리에게 갈등, 독점, 힘, 증오야말로 참된 정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우리의 불행은 만남, 나눔, 관용, 화해를 통한 정의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참된 정의와 평화의 만남과 실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이루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는 공동체를 위해 간구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 민족과 여러분에게 복을 베푸시어, 평화를 수출하고, 번영을 나누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주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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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재의 저항(왕하 21:19)
성경본문: 열왕기하21:19
19 아몬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므술레멧이요 욧바 하루스의 딸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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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적이며 독재적인 정치를 펼치던 아몬이 반역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2년이라는 짧은 통치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했으며 그의 부친 므낫세의 악한 행적을 본받아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들에게 무자비한 포학정치를 행함으로 자신의 치세는 의롭지 못한 부도덕한 정치였으며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통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못된 통치는 올바른 저항을 가져오며 그 저항은 결국 승리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I. 아몬의 통치 행적(왕하 21:20)
아몬은 백성들의 주권과 뜻을 무시한 독재적인 통치를 펴왔습니다.
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함( 20절)
아몬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백성들을 통치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모시지 못한 자는 공의로운 통치를 할 수 없습니다. 악한 행위는 또한 다른 악을 낳습니다. 독재자들의 통치는 의와 선이 중심이 아니라 악이 중심입니다. 악한 권력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악한 통치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통치입니다. 가장 큰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올바로 의지하지 않는 왕은 자신의 권력을 바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롬 13:1).
그러나 아몬은 그 권세가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악을 휘두르며 사용했습니다. 선을 행하며 권세를 사용하는 자는 칭찬을 받습니다(롬 13:3). 하늘에 계신 상전을 기억해야 합니다(골 4:1). 그러므로 아몬의 통치 행적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였으므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2. 악의 길로 행했음(21절)
아몬의 길은 그의 부친 므낫세의 모든 악한 길로 행했습니다. '모든 길'이라는 단어는 곧 므낫세의 사악한 모든 악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뜻입니다.
므낫세의 악행과 잔인성은 이스라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므낫세는 우상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자녀를 붙살라 바치는 악한 행위를 자행했습니다(왕하 21:6).
성경은 므낫세에 대해 기록하기를 '유다와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왕하 21:11)고 했습니다.
아몬이 이렇게 악한 부친 므낫세의 행적을 그대로 본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들의 뜻을 무시한 자기 마음대로의 독재정치를 해왔다는 증거입니다. 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독재자들은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우상을 열열하게 섬깁니다. 이러한 독재의 길은 곧 자신이 세운 신복들이 백성들에 의해서 큰 저항을 받아 그 정권은 무너지고 맙니다.
II. 신복들의 반역과 백성들의 저항(23절)
1. 신복들의 반역(23절)
아몬이 신복들과 백성들 앞에서 공과 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본받아 그 결과로 자기 아래에 있는 신복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궁중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악을 행하는 독재적인 권력의 자리는 속히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세계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백성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독재는 세계 역사에서 큰 저항에 밀러 무너지고 맙니다. 평소에 아몬 왕을 가까이 모시고 큰 저항에 밀려 무너지고 맙니다. 평소에 아몬 왕을 가까이 모시고 있던 신복들이 왕에게 배운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 권력만을 탈취기에 급급한 신복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악한 아몬 왕을 반역하고 궁중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신복들의 경우에는 백성들과 대화나 교제가 없이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폭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오히려 그 신복들도 이제 백성들의 저항에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2. 백성들의 저항(24절)
이번에는 백성들이 일어나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신복들을 다 죽였습니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세워진 독재적인 정권은 의로운 백성들의 저항에 밀려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선한 동기와 선한 방법을 따라 선한 목적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백성들은 의로운 통치를 원합니다. 깨끗한 정치를 원합니다. 정도의 길을 걷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아몬 왕이 죽고 또 신복들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은 새로운 왕을 선택했습니다. 합법적인 왕이며 백성들이 원한 왕이 바로 어린 요시야였습니다(26절).
III. 백성들의 저항으로 세워진 요시야의 통치(왕하 22장)
백성들의 강력한 저항의 힘으로 독재자는 죽임을 당하고 요시야가 왕으로 위에 올랐습니다.
1.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함(왕하 22:2)
요시야는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서 어린 나이에 왕 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도움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도움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입니다.
이스라엘의 둘째 왕이 되었던 다윗에 관해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하리라'(행 13:22)고 하셨습니다.
요시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했습니다. 성경은 요시야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는 독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들을 사랑하며 의를 행하는 정치입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정치입니다.
2. 종교개혁을 단행했음(23장)
요시야 왕 18년에 그는 손상된 하나님의 전을 가장 먼서 수리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왕하 22:5). 하나님의 전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전을 수리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던 대제사장 힐기야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서기관 사반에게 주어 읽게 하고 왕에 갖다 주었을 때에 요시야 왕은 그 율법책을 읽고 감동하여 옷을 찢으며 그 모든 말씀을 준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왕하22:8). 온 백성들은 그 말씀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전에서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와 일월성신의 우상 도구들을 다 예루살렘 밖으로 가지고 나가 빻아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독재자들이 섬기던 우상들입니다. 요시야는 그러한 비도덕적인 독재자들의 세력을 뿌리뽑고 철저한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불합당한 독재 권력은 백성들의 저항에 밀려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아몬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으며 자기 부친 므낫세의 악한 행적을 본받아 온갖 우상과 악으로 독재를 펼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세운 신복들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한 폭력으로 세워진 신복들의 독재도 백성들의 거센 저항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어린 요시야가 합법적으로 왕이 되어 성전을 수리하며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아름다운 통치를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선한 사람을 위한 희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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