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부정선거 잔혹사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대한민국 부정선거 잔혹사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노회한 정치인의 영구집권을 위해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적용하지 않도록 헌법이 개정되었고. 이승만은 다시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국회 간선으로는 대통령이 되기 어려워진 이승만은 ‘발췌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해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56년 실시 예정인 제3대 대선에는 출마할 수 없었는데,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승만은 1954년 9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조항을 도입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해 또다시 헌법 개정을 통해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려는 노욕을 드러낸다.
그러나 11월 27일 이 개헌안에 대한 국회 표결에서 재석 203명 중 135명의 의원만 개헌안에 찬성해 개헌 정족수인 136표에서 1표가 모자라 정부 측 개헌안은 부결된다.
그러나 이틀 뒤 열린 국회에서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개헌정족수인 203명의 3분의 2는 135.33명이므로 사사오입(소수점 이하는 반올림하거나 버림)하면 135명이므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며 황당하고 억지스런 논리를 내세워 앞서 이루어진 개헌안 부결 선포를 뒤집는다.
이렇게 통과된 2차 개헌 헌법에 따라 실시한 제3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고 헌법적 정당성도 결여되었고 국회의결 절차상의 하자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부정선거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지금 시점에서 이런 ‘사사오입’ 개헌 같은 일이 자행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대착오적 선거운동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이승만과 이기붕이,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신익희와 장면이, 무소속으로 조봉암과 박기출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 기간에 고령의 신익희 후보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과 진보진영의 조봉암의 대결로 압축된다.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과 실정에 실망한 국민들은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정부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는데 당시 선거 구호가 이런 국민적 반감을 잘 보여준다.
당시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선거 구호로 사용했고, 이에 자유당에서는 “갈아봤자 더 못산다”로 응수한다. 이에 다시 민주당은 “더 못사나 갈아보자!” “밑져야 본전이다 갈아보자” 등의 구호로 대응했다.
이러한 민주당과 야당의 공격에 수세에 몰린 여당에서는 “갈고 갈면 가루 된다”는 구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의 무리수를 보여주는 일례 중에 하나가 국보 1호인 남대문과 보물 1호인 동대문에 이승만과 이기붕의 선거벽보와 홍보물을 게시한 일이다.
이를 보도한 당시 언론은 ‘서울에 또 하나의 명물’이 등장했다면 자유당 정권의 시대착오적 만행을 비꼬았다.
지금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다.
3·15 부정선거의 예행연습
이승만 정권기 최악의 부정선거는 단연 3·15 부정선거지만 제3대 대선도 이에 못지않은 부정선거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3대 대선은 선거기간 내내 다수의 경찰과 공무원들의 부당한 개입과 선거운동 방해가 자행된 엄청난 관권선거였다.
통장과 반장들은 경찰관 입회하에 주민들을 모아 놓고 자유당을 위한 선거운동을 공공연히 자행했고, 당시 문교부 장관 이선근은 “이 대통령은 위대한 국부적 존재다. 이번 선거에서 이 대통령을 갈아야 한다는 것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를 갈려는 것과 같다”며 노골적인 이승만 지지 연설을 학생들 앞에서 하기도 했다.
심지어 정부는 중앙선관위가 성인인 대학생들은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혔음에도 ‘성년인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선거운동에 참가할 수 없다’며 대학생들의 선거운동과 정치 참여를 자의적으로 금지하고 단속을 벌이기도 한다.
역대선거 최고의 선거 구호.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선거 과정에서의 이런 정부 개입뿐 아니라 개표과정에서도 부정선거는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5월 15일 선거가 끝나고 바로 개표가 시작되어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발표는 즉각 나왔지만 부통령 선거 결과는 사흘이 지나도 발표되지 않았다.
대구 개표장의 경우 이기붕 후보 표 다발 속에 장면 후보 표가 뒤섞여 있는 사례가 다수 발견되자 소란이 발생해 경찰에 의해 개표가 중단되고 급기야 개표장은 무장 경찰에 의해 봉쇄된다.
이런 개표 부정과 개표 중단 사태는 비단 대구에서만의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었고 전국 여러 개표장에서 부정 개표 시도가 폭로되었다.
대구 개표장은 19일까지 봉쇄되고 부통령 선거 결과는 그때까지 발표되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이 “부통령에는 장면 후보가 당선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담화를 발표해 부통령선거 개표 중단 사태를 정리한다.
선관위의 개표 완료와 당선자 발표가 아니라 대통령의 담화로 부통령 선거 결과가 결정되는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무소속 후보자 조봉암은 이런 개표 결과를 보고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탄식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 장면, 조봉암
이렇게 제3대 대선에서 무리한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부통령에 민주당 출신의 장면 후보가 당선되자 정권 유지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당시 이미 80을 넘긴 고령의 이승만이 사망할 경우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은 부통령에게 이양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 서거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정권은 민주당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따라서 이승만은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우리 역사상 가장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는 무리수를 감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부정선거에 저항해 일어난 시민들의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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