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배경
3.1운동 배경
1. 3.1운동 배경
2. 기독교와의 관련
3. 기독교에 미친 영향
1. 3.1 운동 배경
3.1운동이란 ?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경과
이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독립선언문 낭독이며,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했다.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시위 도중 사상자가 생기는 일도 많았다.
서울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 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공식적인 집계로는 진압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중립적인 정보에 의하면, 7,500명이 사망, 45,000명이 체포되었다.
3.1 운동의 시작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일 시: 1919년 3월 1일
장 소: 서울 종로구 의 음식점 태화관
관련자: 민족대표 33인
탑골 공원 시위
일 시 : 1919년 3월 1일
장 소 : 서울 탑골공원
제암리 학살 사건
일 시 : 1919년 4월 15일
장 소 : 경기도 수원군
경과: 3월 말 또는 4월 초에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제암리 학살사건 개괄
1905년 8월 5일 건립된 제암리교회는 H. G.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가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다.
그후 교도들의 증가로 1911년 교회가 마련되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4월 5일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발안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했다. 만세시위가 있은지 10일 후인 4월 15일 일본의 육군 중위 아리타 다케오[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헌병들은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라 하고 4·5만세시위 당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할 것처럼 하더니 총격과 함께 교회당 문을 걸어잠그고 불을 질렀다.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남편을 살려달라 애원하는 아낙 2명의 목을 베었고 제암리 마을 32가구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안종후를 비롯하여 남자 21명, 여자 2명이며 인근 마을 팔탄면 고주리에서 김성렬 등 남자 6명이 학살당했다.
사건 후에도 일본헌병의 심한 감시로 희생자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4월 17일 의료선교사 스코필드가 유골들을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했다. 언더우드 는 참사현장을 돌아보고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냈으며, 스코필드는 일본헌병 몰래 현장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내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여론화시켜 비판하기도 했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순국열사로 추서했으며, 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입장
3.1운동에 대한 당시 일본측의 공식적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朝鮮萬歲騷擾事件)이고, 기본적 시각은 '소요'(뭇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公共秩序)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3.1 운동의 원인과 배경
기본적 원인과 배경
- 일제의 주권 탈취와 한국강점에 따른 민족적 모순의 증대
- 1910년 8월 일제는 한일합병조약을 통하여 한국을 병탄
- 한국인들은 역사 이래 최초의 식민지배에 민족적 비애 절감
- 정치적 탄압, 경제적 착취, 문화적 말살, 사회적 차별을 통해 민중의 잠재적 애국심이 급격히 성장
- 신식교육을 통한 민족 교육으로 자주독립의 의지를 가진 신진 청년세력의 등장
3.1 운동의 원인에 관한 당시 조사 보고서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갈망
�일제의 엄한 군정과 횡포
�민족성 말살의 기도
�사법과 행정에서 한국인 배제 및 차별
�임금, 교육, 법 적용에서 한국인 차별대우
�언론 집회결사의 자유 박탈
�종교의 자유 제한
�토지의 약탈, 기타
2. 기독교와 관련
일제의 종교 탄압과 민족적 종교 세력의 성장,일제의 종교 탄압 기본정책은 회유, 이용, 탄압, 박멸
1915년 포교 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종교 간섭과 탄압의 근거 마련
- 포교자는 자격증을 받아야함
- 교회당이나 포교소의 설립과 변경은 총독부의 허가 필요
1915년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 애국교육을 막으려함
- 학교에서 예배와 종교 교육금지
- 학교에서 수업도 일본어로 하도록 강요
기독교의 대응
교회의 조직화, 세력화
- 1912년 장로교 총회의 조직
- 1915년 장.감 연합기관지로 <기독신보> 창간
기타신학전문지가 창간되어 교회의 질적 성장과 교계지도자 배출의 배경이 된다.
- 1918년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회 창립으로 교파 협력 기틀마련
기독교 조직화와 성장, 지도자 배출, 교파 연합은 기독교의 3.1운동 참여에 큰 공헌을 한다.
3.1운동으로 인한 기독교인 박해
체포된 자 : 3,804
체포된 목사, 장로: 134
기타 기독교 관계 지도자로 체포된 자 : 202
감금된 남자 신자 : 2,125
감금된 여자 신자 : 531
매맞고 방면 된 자 : 2,162
사살된 자 : 41
현재 수감중인 자 : 1,642
매맞고 죽은 자 : 6
파괴된 교회당 : 12
3. 기독교에 미친 영향
외적 탄압 : 물리적 탄압
교회의 양적인 피해와 기능 마비
내적 탄압 : 일제의 회유 분열 정책
교회의 질적인 피해와 정신적 피해
선교사와 한국 교회. 교회 지도자와 평신도,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모략으로 이간시켜 세력 약화, 회유하여 독립의지를 훼손시킴. 예들 들어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 같은 논리.
3.1 운동이 1920-30년대 한국기독교의 신앙양태에 미친 영향
3.1운동 후 기독교의 대표적 신앙양태
1.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 주로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주도 되었으며 교회 내의 민중성향을 지닌 교인들이 주체,기적과 이적을 동반한 열광적 부흥운동은 3.1운동 직후의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 사회분위기에서 창출된 신앙운동,
이런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은 1930년대에 재림 및 종말 신앙으로 발전 되는데 한국교인들의 현실도피적 내세신앙이 정착하는 계기
2.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운동
3.1운동 실패를 민족의 독립역량부족으로 이해
항일투쟁보다는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경향
기독교 정신으로 민족과 나라의 개조의식
일제의 기독교 정책 변화
총독 1919년 9월 선교사들과 회담을 개최하고 <연합종교회건백서>를 제출
이런 조치들을 통해 일제는 선교사들을 친일적 방향으로 유도
3.1 운동과 기독교는
한국기독교는 복음 수용 초기부터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위상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3.1. 운동에 기독교가 다른 민족 세력과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투쟁을 벌인 것도 당연했다.
그로 인한 피해도 막심했으나 기독교는 3.1.운동 참여로 '민족의 종교'로 자리를 매길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질적 변화, 현실도피, 내세신앙으로 가는 계기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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