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구국선언 전태일이 시작, 민주주의 불 당겼다

3·1 구국선언 전태일이 시작, 민주주의 불 당겼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최고조에 달하던 197631, 김대중·문익환·윤보선·함석헌 등의 재야인사들은 정권의 '긴급조치 9'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살리고자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정권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이들을 반정부 선동 혐의로 옥에 가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붕괴에 균열점을 낸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3·195주년 및 3·1 민주구국선언 38주년, 무죄판결 기념 '3·1 민주구국선언 기념대회'1일 오후 2시부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9옥사 앞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엔 당시 옥고를 치렀던 문동환 목사, 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등이 직접 참가했다. 또한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옥고를 치렀던 성남주민교회 신도들도 이날 자리를 빛냈다.

 

행사 초반에 이희호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의 격려사 영상이 상영됐다. 그의 남편 ()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신민당 의원)은 당시 3·1 민주구국선언 발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이사장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행사에 참석은 못 하고 영상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이사장은 "당시 긴급조치 9호 앞에 당당히 서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참가자들 모두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선언에 참가한 것이었다"고 했다. 이어 "지난해 37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것은 역사와 정의의 승리였다"고 했다.

 

이희호 이사장 "지난해 무죄판결은 역사와 정의의 승리"

지난해 73일 서울고등법원(부장판사 이진규)은 당시 피고인들에 대해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선고에서 "(피고인들에 대한 유죄 선고는) 말하기 부l끄러울 정도로 문제가 많은 조치였다. 피고인들과 가족들의 절망과 아픔에 대한 위로와 사죄로서 재판부가 뒤늦게나마 판결을 바로잡는다"고 했다.

 

이희호 이사장38년 전 남편과 동료 인사들이 옥에 있을 때 '3·1 사건 가족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가족 면회와 재판 방청을 제한받자 가족대책위원회는 항의 차원에서 입을 십자 모양으로 봉하고 시위를 했다. 이들의 활동은 이후 민주화 운동 시기 내내 구속자·희생자 가족들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줬다.

 

선언문을 낭독하는 문성근씨 문익환 목사3문성근씨3.1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이 이사장의 영상 메시지에 이어 문성근 국민의 행동 상임위원의 당시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그의 부친 고 문익환 목사 역시 이 선언문 발표의 중추였다. 문 목사는 선언문 발표 1년 전인 1975, 평생 지기 장준하 선생이 민주화 운동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걸 보며 본격적으로 민주화의 길에 뛰어들었다. 19763월의 감옥행은 이후 그의 삶 대부분을 차지한 감옥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시금 민주구국선언을 외쳐야 하는 상황이 통탄스러워"

 

각 정당에서도 대표 인사를 왔다. 민주당 인재근 의원"38년 전 이 선언의 외침이 지금도 낯설지 않은 상황"이라며 그때로부터 나아지지 않은 현재 상황을 언급했다.

그는 "2014, 민주주의는 휘청거리고, 경제민주화는 실종되고, 통일은 급조되고 있다. 다시금 민주구국선언을 외쳐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죄송스럽고 통탄스럽다"고 했다.

 

통합진보당 김미희 의원은 훼손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예시로서 통합진보당이 겪고 있는 현 상황을 언급했다. 김 의원"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당을 해산시키는 문제는 단순히 통합진보당만의 문제가 아닌, 국민의 피땀으로 세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대들보를 훼손하는 일"이라 했다.

 

이어서 당시 직접 선언문 발표에 참가하고 옥고를 치른 함세웅 신부이해동 목사가 생생한 당시 경험담을 들려줬다.

함 신부"당시 박정희31일이 휴일이라 쉬면서 술 마시고 있다가 우리의 선언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선언자 중에 김대중씨의 이름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김대중 이름만 들어도 기절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김대중? 다 구속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30여 명을 무작위로 조사하고 18명이 구속됐다"고 했다.

그리고 토요일에 다른 재판 일정까지 없애면서 선언 참가자들에 대한 재판을 강행했던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해동 목사3·1 민주구국선언이 있던 당시 명동성당에서의 미사는 평온 속에 끝났다는 걸 강조하며,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7백여 명의 미사 참석자가 있었다.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고, 이우정 선생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모두들 헤어졌다. 그 선언문을 낭독했을 뿐, 관련자들은 모두 아무 일도 없이 귀가했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다들 밤잠을 잤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관련자들이 모조리 연행되기 시작했다. (중략) 농성이나 시위 하나 없이 조용히 끝낸 걸 가지고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침소봉대함으로써 굉장히 큰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목사"박정희 생각으론 한 줌 밖에 안 되는 목사와 신부들 몇몇만 감옥에 쳐넣어 버리면 세상이 조용해지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3·1 민주구국선언은 오히려 박정희 유신정권에게 있어 덫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평온 속에 끝난 미사,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둔갑하다

 

이 목사함 신부3·1 민주구국선언이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는 걸 강조했다.

이 목사"3·1 민주구국선언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온전히 일치를 이룬 사건이다. 전세계에 가톨릭 신부와 개신교 목사가 함께 감옥 간 사건이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이라며 민주주의를 위해 종교인들이 종교의 차이도 초월했음을 강조했다.

 

함 신부는 이날 행사 장소이자 지난날 자신들이 감옥생활을 했던 곳인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성을 언급했다.

서대문형무소처럼 제국주의와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독립운동가, 민주화 운동가, 통일운동에 뛰어든 사람이 모두 투옥된 감옥은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함 신부는 이어 "이런 역사성이 있는 서대문형무소를 1987년 전두환 정권은 철거하고 아파트를 지으려 했다. 그나마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 "박정희도 잔인하지만 이 탄압의 장소를 모두 없애려 한 전두환 등 유신 졸개들에 대한 꾸짖음도 있어야 하겠다"고 해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3.195주년 및 3.1 민주구국선언 38주년.무죄판결 기념 '3.1 민주구국선언 기념대회'1일 오후 2시부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9옥사 앞에서 열렸다.

3.195주년 및 3.1 민주구국선언 38주년.무죄판결 기념 '3.1 민주구국선언 기념대회'1일 오후 2시부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9옥사 앞에서 열렸다.

전두환, 서대문형무소 없애고 아파트 지으려 했다

 

행사 마지막에 문동환 목사가 노구를 이끌고 단상에 올라 인사말을 전했다.

문 목사"감옥에 있을 때, 내 머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전태일이었다. 3·1 구국선언은 전태일이 시작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불을 당겼다"고 한 다음, 단상 뒤 당시 민주구국선언 참가자들의 사진들을 가리키면서 "여기 피어난 꽃들, 다 전태일 때문에 피어난 꽃이었다"고 했다.

 

문 목사는 또한 3·1 민주구국선언의 '폭력의 시대는 갔다.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다'란 구절을 인용하며 "한국 백성들은 보통 백성이 아니다. 반드시 평화의 시대를 이룩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대문형무소)서 시작한 평화가 온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다"라며, 3.1 민주구국선언에 참가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이전 독립운동을 하다 이곳에 갇힌 사람들 모두가 이 땅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했다.

문 목사의 발언은 모든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문 목사의 발언이 끝난 뒤, 38년 전을 기억하며 관객 전원이 만세 삼창을 하는 것으로 이날 행사는 막을 내렸다.

 

3.1 민주구국선언,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3.1 민주구국선언의 핵심 기치는 다음의 세 가지였다.

하나,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선언문에선 먼저 민주주의의 실현을 강조한다. 당시는 박정희 유신정권1975년 선포한 '긴급조치 9'의 서슬이 시퍼랬다.

선언문 1항에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있다.

긴급조치가 모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겨울 공화국'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긴급조치에 대한 정면 도전을 한 것부터 그 의미는 남달랐다.

 

또한, 선언문은 '경제입국 구상과 자세의 근본적 검토'를 언급하며,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를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노동자들의 기본 권리인 노조 조직권과 파업권을 박탈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차관기업과 외국자본에의 착취에 내맡긴 채 이뤄지던(선언문 2) '경제입국' 정책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었다. 국민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리지 못하고, '경제성장의 역군'이란 미명하에 희생만 강요당한다면 그 경제성장은 아무 의미 없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선언문의 마지막 부분에선 민족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승공'이란 단어에서 보이듯, 선언문엔 당시의 반공적 분위기가 남아 있다.

북한을 '화해와 협력의 대상'보단 '이겨야 할 대상'으로 봤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 '평화통일'임을 강조한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충분하다. 또한, 분단으로 인해 민족의 행복과 창조적 발전을 위해 동원되어야 할 정신적, 물질적 자원이 고갈되고 있음(선언문 3)을 지적한 것도 중요하다.

 

이 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문익환 목사와 김대중 대통령은 이 선언의 '평화통일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문익환 목사1989년 북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4.2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2000년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문 목사김 대통령의 실천은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데 있어 남과 북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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