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은 왜 이리도 빠른고
인생의 가을은 왜 이리도 빠른고
김동길/연세대 명예교수
계절에 봄이 있듯, 누구의 삶에나 봄은 있게 마련입니다.
봄이 아름답다고만 표현할 수 없습니다.
봄은 찬란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봄은 덧없이 가버리고 여름이 왔습니다.
시인 쉴러가 탄식했지요,
“짧은 봄이 나에게 다만 눈물을 주었다”고.
봄 뒤에 여름이 왔었습니다.
옛글에도 ‘녹음방초가 승화시라’했으니, 녹음이 우거지고 향긋한 풀 냄새가 감도는 여름 한철이 꽃피는 봄철보다 못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여름은 더욱 활기찬 계절이어서 아무리 고된 일을 하고도 한잠 자고 새벽에 일어나면 온몸이 가뿐한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여름 뒤에 복병처럼 가을이 숨어 있다 불쑥 나타났지요.
말로는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감은 나지 않았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인생의 가을을 맞아 머리가 희끗희끗한 선배들을 보면서도 내가 머지않아 그런 신세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을은 어김없이 왔습니다.
고려 말의 선비 우탁이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어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정말 기막힌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내 인생의 봄철, 여름철에는 내 머리 위에 흰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었습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에는 저절로 생긴 ‘웨이브’까지 있어서 내 눈에도 참 좋아 보였는데, 내가 봐도 가을에 내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죠.
가을에는 그렇게 잘 보이던 눈이 갑작스레 잘 안 보입니다.
잔 글자가 가물가물합니다,
눈을 비비면 다시 보이다가 곧 안 보이는 까닭이 무엇인고?
그래서 안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이 사람은 내 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자신의 진단 결과를 요약합니다.
“별일 아닙니다, 노안이 되신 것이니 돋보기를 쓰셔야지요.”
안과 의사로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뇌까리는 예사로운 말인지는 모르지만 나의 인생에는 처음 떨어진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이젠 돋보기를 써야 하는 노인이 되었구나.”
학생 시절, 시력 검사를 할 때마다 양쪽 눈이 한결같이 ‘1.2’ ‘1.2’ 하던 내 눈은 어디가고, 이제 돋보기를 써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는가.
돋보기를 써야 한다는 의사의 선고가 내 자존심을 크게 건드린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럽게 여겨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래저래 돋보기를 집에 두고 기차나 비행기를 타면 남의 자리에 앉아 있는 수가 더러 있습니다.
손에 든 승차표 좌석번호에 적힌 숫자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3’자인지 ‘8’자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옆에 있는 젊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죠.
“내 좌석번호가 몇 번입니까”라며, 내 표를 보여주며 물어보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을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어서 나의 몇 푼 안 되는 자존심이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옛날, 할머니들이 바늘귀를 꿸 때 바늘과 실을 되도록 멀리 두시죠.
눈도 크게 뜨지 않고 더욱 가늘게 뜨고!
내 신세가 그렇게 될 줄이야!
얼마 뒤에 젊은 사람이 다가와 “선생님, 이게 제 자립니다”라고 할 때 나는 그 젊은이에게 ‘당신 자리가 몇 번인데? ’라고 마땅히 따져야 하는데 내게는 그럴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의 그런 말을 듣자마자 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내가 틀린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리고 “죄송합니다” 하며 내 자리를 찾아가는 내 꼴이 “이게 뭡니까?”
초가을의 인생은 그런 겁니다.
가을은 서글픈 계절입니다.
‘추수하는 결실의 계절’이란 말은 옛날 농경사회에나 어울리는 표현이고, 오늘 우리가 사는 산업사회에서는 슬픈 추억만이 감도는 아련한 계절이 가을입니다.
오래전 어느 가을에 여고생들이 합창하던 ‘이별’이라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박목월이 시를 쓰고 김성태가 곡을 붙인 이 애절한 노래를 부산 피난시절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60년도 더 된 옛날에 들은 이 노래가 이 가을에 또 생각납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이 노래가 3절에 가면 이렇습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그런데 1절, 2절, 3절을 부르고 매번 되풀이해야 하는 후렴은 긴긴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아 아,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절실한 가을의 노래가 아닙니까.
시인 중에 시인이었던 중국의 이태백은 그의 가을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침상 머리 비치는 달빛을 보고 서리가 내렸는가 의심했지요
고개 들어 산 위에 달을 보았고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했다오“
牀前看月光(상전간월광)
疑是地上霜(의시지상상)
擧頭望山月(거두망산월)
低頭思故鄕(저두사고향)
동양인의 가슴에만 가을이 서러운 건 아니고 서양인에게도 가을은 슬픈 계절인 듯합니다.
6·25전쟁 뒤에 유행했던 프랑스의 샹송 하나는 애절한 슬픈 노래인데 영어로 옮겨져 가을의 낙엽과 이별의 슬픔이 아우러진 노래가 되었습니다.
“내 사랑이여 나 그대를 못 잊어 하네,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면”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
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그리고 영국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유명한 가을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는 절친했던 친구 핼람을 잃은 슬픔 때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때는 가을 이었습니다.
“눈물이여, 하염없는 눈물이여
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네,
어떤 거룩한 절망의 깊음에서 생겨나
가슴에 솟구쳐 두 눈에 고이는 눈물
행복한 가을의 들판을 바라보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날들을 생각할 적에
Tears, idle tears, I know not what they mean,
Tears from the depth of some divine despair
Rise in the heart, and gather to the eyes,
In looking on the happy Autumn-fields,
And thinking of the days that are no more.
고향이 그립고 친구가 그립고 세상 떠난 부모와 형과 누나가 그리운 계절입니다.
“인생은 괴로우나 아름다운 것”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이 글을 쓰면서도 이 늙은이의 눈에는 이슬이 맺힙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그리고 인생 자체가 서럽게 느껴집니다.
나이 들면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지고 나도 모르게 감상적이 되는 게 아닐까요.
가을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조선조의 뛰어난 선비 고산 윤선도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가을 윤선도’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을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가을의 해는 짧습니다.
그리고 세월의 템포가 말할 수 없이 빠른 계절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피었다 곧 지는 것이고 봄풀의 푸름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억울한 한평생을 살았던 선비 윤선도는 꽃지고 풀시든 들판의 큰 바윗돌 하나를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다 변해도 너만은 변하지 않는구나.”
몰아치는 비, 바람, 눈, 서리에도 굽힘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저 큰 돌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목숨 바쳐 섬기던 그의 임금님과 그 나라, 그 백성이 아닐까요.
고산이 오늘 살아있다면 그에게 ‘변치 않는 바위’는 곧 그의 조국 대한민국일 것이고 그 조국의 자유민주주의일 것입니다.
“아 아,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그러나 5000년 지켜온 우리의 조국은 영원합니다.
5000년 뒤에도 여기 이렇게 존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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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 길
● 1928년 평남 맹산 출생
● 1951년 연희대 영문과·미국 에반스빌대 역사학과 졸업, 보스턴대에서 링컨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 연세대 교무처장·부총장, 조선일보 논설고문, 제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 (현)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 연세대 명예교수
● 저서 : <길은 우리 앞에 있다> <링컨의 일생>
<한국청년에게 고함> 등 8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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